잡담/생각들 11

성경은 신화인가?

불트만이 잘 이야기한 것처럼, 신화란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초월적인 것들을 이 세상의 것들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정말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의 것으로 표현하는데 신화적 언어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보통 보수주의자들이 신화라는 단어에 염증을 느끼는 이유는 신화라는 단어를 “실존하지 않는 허상의 것”으로 이해할 때 일어난다. 이를 무지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신화’라는 단어를 소비하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의 컨센서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은 신화라는 단어를 극도로 경계한 나머지 신학의 논의 밖으로 밀어내버렸다. 그러나 불트만이 말한 신화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오히려 신화의 본래적 의미라고 생..

잡담/생각들 2023.06.15

사탄교는 리터럴리 사탄을 숭배하는가?

공부하고 있는 GCTS 옆에는 온갖 오컬트의 성지, 세일럼이 있습니다. 세일럼의 심볼이 빗자루를 탄 마녀일정도로 이 도시는 마녀와 유령을 사랑합니다. 마녀 박물관이 있고, 세일럼의 투어에는 마녀와 유령이 빠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이 도시를 찾습니다. 특히 할로윈에는 도시로 향하는 길목이 꽉 막힐 정도로 상징적인 곳입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의 배경이 되는 도시도 바로 이 세일럼이기도 합니다. 세일럼이 마녀의 도시가 된 이유는 웬즈데이의 배경으로 설정된 것처럼, 매사추세츠에 상륙했던 청교도들의 마녀재판 때문이었습니다. 발단은 청교도 목사의 딸과 조카딸의 발작과 이상행동으로부터 였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건 남미계 노예 소녀와 1년간 교회에 나가지 ..

잡담/생각들 2023.04.28

워라밸이라는 악령

영이라는 단어를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하여 우리의 논의 밖으로 밀어내거나, 가볍게 생각하여 세속화하는 일 모두 지양할 일이다. 생각보다 영은 우리의 삶에 편만한 동시에 다소 깊은 차원에서 작용한다. 현 사회에 수많은 악령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그 대표적인 악령 중 하나다. 일과 삶의 밸런스라는 단어는 일을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고, “일”이라는 개념을 악마화한다. 이원론적인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과 삶이 분리되는 순간 삶은 불행해진다. “나”라는 존재는 두 개(혹은 그 이상의) 역할놀이를 해야하며, 이러한 정신분열적인 자아분리는 “하나의 영”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여기에서는 이런 가면, 저기에서는 저런 가면을 쓰는 일은 언제나 불행하고 피로하다...

잡담/생각들 2023.03.09

결핍에 대한 짧은 생각

.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곧 당신이다.” 근래의 인간, 절대자를 지워버린 그곳에는 “그가 바라는 것”만이 남는다. 리오타르가 잘 지적했듯이 누군가가 무엇을 바란다는 건(욕망한다는 건) 그것이 그에게 결핍 되었다는걸 의미한다. . 곧 꿈이라는건 결핍된 존재(사실은 결핍을 자각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이 결핍을 채워내는데에서 모종의 희열과 인생의 기쁨을 경험한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핍이라는게 채워지고 난 뒤에는 꿈은 더 이상 꿈으로 남을 수 없게 된다. 먼지처럼 삶의 뒤안길로 흩어질 뿐. 우리는 그토록 수많은 꿈을 먼지로 흩뿌려가며 살아 간다. 하나의 꿈이 흩어지면 또 다른 결핍을 꿈꾸면서 말이다. 결국 결핍 그 자체가 인생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 결핍이 채워진 뒤, 결핍을 상실한 인간..

잡담/생각들 2022.02.15

노을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여 이집트에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동쪽은 삶의 공간, 서쪽은 죽음의 공간이 자리한다.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기 때문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서쪽에 이집트의 왕릉인 피라미드가 무리지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일출이나 일몰이나 동일하게 해가 지평선에 자리하지만, 일출은 신년의 정동진이 그러하듯이 어떤 기대감과 에너지 희망을 느끼게 한다. 반면 일몰을 보고 있을 땐 끝모를 먹먹함이 찾아온다. 강화도의 색은 일출보다는 일몰에 가깝다. 강화도 이런 저런 지역에서 지내기를 여러 해를 반복했다.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있는데, 일몰 직전 1시간이다. 앞으로 조금 있으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던 저 태양이 바다 너머로 사그라들 것..

잡담/생각들 2021.10.28

하나님의 집을 인테리어하기

공간을 준비하면서 인테리어에 대한 글들을 조금씩 엿보게 된다. 글을 보면서, 또 공간을 준비하면서 내가 내린 인테리어의 정의는 이렇다. 전하고자 하는 가치, 함께 경험했으면 하는 가치들을 공간적인 요소로 표현하는 것. 많은 인테리어들이 컨셉의 부재로 실패한다. 이것저것, 좋아보이는걸 모조리 때려박다보면 인테리어는 실패하게 되어있다.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소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런저런 곳에서 따온 소음은 정작 전해져야할 음성을 묻어버린다. 이 공간을 통해 전하고자하는 게 명료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모든 요소들이 한가지 지향점을 바라봐야한다. 때문에 인테리어를 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건 이 지향점이 얼마나 명료한지, 또 이 지향점에 대해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느냐이다. 여기에 ‘사용할 ..

잡담/생각들 2021.08.14

교회는 성경인물들을 영웅시 해왔다.

시대의 흐름을 좇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다. 신학의 의무는 이와 같이 세차게 흐르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외치는 일이어야했으나, 어쨌거나 신학자들조차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의 정신에 현혹되어 변치 않는 말씀마저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필요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특히 성공주의가 넘실대는 시기에 편승했던 성경해석은 세상에 상당한 유익을 주면서도 동시에 일단의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성공주의 아래에서 교회는 성경인물들을 영웅화해왔다.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영웅시하고 ‘이들과 같이 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어느순간부터 신앙인들은 이들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성공주의의 본질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과 닿아있다...

잡담/생각들 2021.05.25

능력주의의 한계, 마이클 샌델의 발언을 접한 후기

능력주의에 대한 샌델의 이야기도 그렇고, 작년에 봤던 마르코비치의 메리토크래시 트랩도 그렇고 최근 사회적으로 이 능력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 같네요. 소위 "능력이 있으니 이정도 대우를 받을만해"라는 "신앙"이 사실은 조작된 허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전에는 단순 자본을 대물림했다면 이제는 자본이 아닌 "능력"을 물려준다고 하죠. 아래 샌델의 지적처럼 능력대로 자원을 분배하는게 공정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투입된 자본의 양과 비례하더라라는 겁니다. 정당해보이는 형태로 부가 세습되고,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대학을 보내고 싶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대학을 나와 세상에 어떤 아웃풋을 내놓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대학 등록금을 내느니 그돈으로 포크레인을 사주라는 둥, 단순히 돈으로..

잡담/생각들 2021.01.22

박원순 시장의 죽음. 생명과 고통의 무게에 대하여

오늘 새벽, 실종되었던 박원순 시장은 북악산 언저리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삼선째 서울 국정을 이어오던 시장이자 대한민국의 이인자였던 그는 성추문 의혹만을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다다르게 했으며,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다양하게 갈리는 사람들의 평가 속에 크리스챤은 이러한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또 노무현 전대통령, 노회찬 전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들의 자살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를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일러두기 : 우선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전제를 둔 채로 이야기해보려한다. 여비서의 성추행 고소가 아니고는 자살의 이유가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무언가에 뜨거운적이 있나? 박원순 전시장의 죽음은 고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의원의 죽음과 닮아..

잡담/생각들 2020.07.10

팀 켈러,복음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정치체제와 복음에 대해)

지난 수 세기 동안, 기독교 내부에서는 다양한 형태와 이름을 지닌 운동들이 등장했다. 종종, 그들은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들고 일어났다. 오직 믿음에 근거한 구원을 강조했던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 역시 자신들을 이런 방식으로 지칭했다. 케임브릿지의 성직자로 영국 국교회에서 저교회파 갱신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시므온 또한 “복음주의”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18세기, 대서양 건너편에서 웨슬리 형제들이 이끈 부흥 운동 역시 “복음주의”라고 불렀다. 1940-50년 어간, 빌리 그래함과 같은 이들은 문화를 적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로부터 떠나려는 주류 개신교도주의들 사이에서 어떤 종교적인 지대를 찾으려했고, 이를 묘사하기 위해 “복음주의”를 사용했다. 각각의 단계들을 지나오며 이 개념은 서로 ..

잡담/생각들 202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