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실종되었던 박원순 시장은 북악산 언저리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삼선째 서울 국정을 이어오던 시장이자 대한민국의 이인자였던 그는 성추문 의혹만을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다다르게 했으며,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다양하게 갈리는 사람들의 평가 속에 크리스챤은 이러한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또 노무현 전대통령, 노회찬 전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들의 자살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를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일러두기 : 우선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전제를 둔 채로 이야기해보려한다. 여비서의 성추행 고소가 아니고는 자살의 이유가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무언가에 뜨거운적이 있나?
박원순 전시장의 죽음은 고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의원의 죽음과 닮아 있다. 저마다 죄의 경중은 다르지만, 올곧음과 청렴을 줄곧 주장하던 인물들에게 어떤 치명적인 흠이 발견되자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살아간다. 이 신념이라는건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전부가 된다. 이는 죽음보다도 강력하다. 몇몇 사람들은 저마다 그깟 신념이 뭐라고 죽음을 선택하냐고 이야기를 하지만, 진정한 신념이란, 내 삶의 전부이자 인생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신념을 수정하거나 바꿔내는 것은 정말로 큰 어려움. 거진 죽음을 선택하는 것만큼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사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다. 특정한 신념을 갖고 그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돈을 자신의 신념이자 가치관으로 세워두는 사람들은 돈을 잃게 될 때 세상을 등진다. 애인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실연의 아픔을 겪고 세상을 등지는 이유와 같다. 자신의 전부였던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곧 나 자신을 소멸하는 경험을 낳게 된다. 혹자들은 개인의 정체성과 특정한 가치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을 어리석다 표하지만, 사람은 사실 그럴 수 없다. 공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리오타르의 지적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다. 때문에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때 재빨리 그 무언가가 되어간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그 무언가로 재해석되며 개인의 정체성이 포맷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경험은 단순히 살아 숨쉬는 것 그 이상이다. 이런 종교적 경험을 맛본 사람에게 인생은 단순히 살아 숨쉬는 그 이상이 된다. 합리성으로 따질 수 없는 만큼 이 신념이라는건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다. 사족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표현하기는 한다.
그렇다면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시장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인권을 위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자부심이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스스로가 믿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꿈꾸는 천국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다소 교조적이며, 다소 현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 권리를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네들의 생을 소모해왔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신념이자 종교였으며, 스스로를 구성하는 정체성 그 자체였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원동력은 아주 강력하다. 강한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뜨거움. 그것이 이들을 움직이게 한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욕망하는 그 미래에 부합하지 않을 때 이들은 삶의 이유를 잃고 지구에서 방을 빼게 되기도 한다.
그들은 뜨겁게 살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뜨거움, 어긋난 뜨거움은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던져넣기도한다.
2. 잘못된 신념, 그리고 제물
모든 신념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자신의 인생, 주어진 시간 심지어 어떤 신념의 경우는 생의 일부를 깎아가면서까지 달성할 수 있다. 박시장 역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많은 것을 지불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 온갖 희생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것.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일에서 희열을 느끼며, 이러한 신념의 달성을 위한 과정에서 얻게 되는 스스로를 불태우며 얻게되는 희열은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곤한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자기희생이라는 변태적인(하지만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이 갖는) 마조히즘에 취하곤한다. 이런 신념으로 표현되는 우상들에는 돈, 권력, 자기욕심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만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사실 인간이 취하는 모든 열정적인 것들이 그러하다. 운동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몸(운동의 종류와 목적에 따라 이 또한 다양하게 갈린다)을 약속 받고 오늘을 희생한다. 이러한 자기희생은 개인의 미래를 확증하기도하며, 나아가 사회의 미래를 약속받는다. 꿈꾸는 천국을 위해 오늘을 갈아넣는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열망, 좀 더 넓게보자면 사회에서의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제물을 바친다. 수험생들은 오늘을 갈아넣어 좋은 대학이라는 이름표를 취득한다.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박원순 시장의 경우, 꿈꾸는 세상을 위해 청년기 뿐 아니라 64년의 인생 모두를 갈아넣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스스로를 매일 같이 제물로 바치며 미래를 소망해왔을테다. 박시장은 자신만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 가족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언급한(무엇이 미안한지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시장의 유서에서볼 수 있듯이 꿈을 좇는 사람은 가정을 돌보는 일조차도 희생해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사회의 폐해라고 보기 어렵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희생해야한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사람의 인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나 무언간 타자를 위해 일하는 것, 그러니까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난 욕망들을 '선하다'라고 평가한다. 지금의 박시장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선함'을 찬양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안타깝게도 박시장이 섬기던 그의 신념은 부분적이며, 부분적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가 자신의 유토피아를 이루고자했던 방법 또한 불완전했다. 자신을 갈고 닦아, 단련하고 매일을 실천하며 살아왔던 박시장은 그렇게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에서 버려졌다. 아니 사실 그가 섬기던 그의 신념은 헛된 것이어서, 애초부터 이룰 수가 없는 목표였다. 평생을 헛된 것에 바쳐왔다는 것이 이제사 증명되었기에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개중에는 히틀러처럼 스스로의 욕망과 신념에 확신이 차 사람들을 불구덩이로 밀어넣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믿는 바에 확신이 약하여 어영부영 살다가 가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모두가 헛된 것을 바라고, 모두가 헛된 방법으로 얻어내고자한다. 아주 작은 흠결하나, 그 흠결은 스스로 꿈꾸는 미래에 적합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를 이루던 그 신념으로부터 버림 받은 바로 그 순간 박시장은 자신이 믿는 바를 바꾸거나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 이 두가지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뜨거웠던 삶을 살았지만, 바로 그 불구덩이에서 정말로 스스로 소멸시키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던 것이다.
3. 무엇을 위해 삶을 불태워야할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3절
우리는 지혜롭게 삶을 불태워야한다. 산제물로 드리되, 옳은 것을 위해 드려야한다. 그리고 옳은 것을 꿈꿔야한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항상 그 정죄에 자신이 빠지게 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박시장이나 노전대통령, 노전의원과 같은 사람들은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의로 갈 수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은 언제나 이렇다. 마땅히 그 천국에는 특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존재할 수 있으며, 얼마나 열심히 제물을 바쳐온 사람인지에 따라 입장권이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 때문에 진보인사들이 그토록 교조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멸을 표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야한다고 간접적으로 요구하곤 한다. 결국엔, 그들조차도 이런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살아가야한다. 올바른, 정의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역시나 왜곡된 절대자이다. 다크나이트의 마지막 장면,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짊어지고 떠나는 그 모습이 배트맨을 밝은 빛으로 이끄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그러했던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한다. 작은 흠에 견디지 못해 삶을 등지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인간의 불가능성을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인간으로는 안된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박전시장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의 거절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끝을 맞이한게 아닐까? 나무에 목을 걸 때 그의 심정은 얼마나 허전했을까. 적어도 그 순간, 자신이 믿는 바를 수정하는 것보다 삶을 버리는 일이 지기 쉬운 짐이었기 때문일거다. 무게를 달아봤을 때, 나를 부인하고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일, 이것보다야 죽는게 더 쉽다.
하지만, 그런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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