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생각들

교회는 성경인물들을 영웅시 해왔다.

에멀전 2021. 5. 25. 11:55

일상들은 모여 빛이 된다. 교회도 그렇다. 성도 개개인의 일상이 모여 반짝이는 빛이 될 수는 없을까?

시대의 흐름을 좇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다. 신학의 의무는 이와 같이 세차게 흐르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외치는 일이어야했으나, 어쨌거나 신학자들조차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의 정신에 현혹되어 변치 않는 말씀마저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필요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특히 성공주의가 넘실대는 시기에 편승했던 성경해석은 세상에 상당한 유익을 주면서도 동시에 일단의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성공주의 아래에서 교회는 성경인물들을 영웅화해왔다.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영웅시하고 ‘이들과 같이 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어느순간부터 신앙인들은 이들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성공주의의 본질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과 닿아있다. 삶의 목표를 정상에 다다르는 것으로 정의하는 일. 신앙의 세계관이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되는 순간, 정점에 다다르지 못한 인간은 도태되고, 정점에 다다르려는 인간은 불행해진다. 그렇게 성공주의는 기독교를 좀먹었다. 성공주의라는 미신은 기생충마냥 기독교 안에 기생하였다. 사탄이라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기독교의 진실에 거짓 한스푼을 섞어 많은 성도들을 현혹하였다. 

 

성경이 수많은 성경인물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이들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은 여전한 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상의 인물들에게 어떻게 관심을 갖고 계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 그리고 그 반응들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를 담은 책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성경인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결정을 했는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다는 히브리서의 증언처럼 “그들은 대체 무엇을 바라보았기에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는가?가 되어야한다. 이러한 반응들은 크게 특별할 것 없는 반응이다. 내일 100%가 오를 주식을 알고 있다면 그 주식이 오늘 10%가 떨어졌다고 해도 거금을 들여, 아니 오히려 빚을 내서라도 투자하는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하나님의 나라를 뚜렷하게 갈망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당연한 선택이다. 

 

이와 같은 당연한 일상의 선택들을 영웅의 자리로 올려놓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망가지게 된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것은 그들이 해낸 훌륭한 선택들이 아니라 그 선택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기에 그런 반응들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아야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표적들은 무엇이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한다. 

 

신앙은 어디로 달려가는 일은 맞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음질한다. 그러나 그 달음질은 내딛는 한발자국씩으로 구성된다. 이 한발자국을 어디로 내딛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한발자국에 집중해야한다. 매일의 일상 속에 한걸음을 딛다보면 놀랍고도 멋진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건 단순히 이 세상에서 부유해지거나 성공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어려운 한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의 경험이다. 그렇게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이제 완연히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고, 교회들의 삶이어야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교회들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