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 세기 동안, 기독교 내부에서는 다양한 형태와 이름을 지닌 운동들이 등장했다. 종종, 그들은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들고 일어났다. 오직 믿음에 근거한 구원을 강조했던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 역시 자신들을 이런 방식으로 지칭했다. 케임브릿지의 성직자로 영국 국교회에서 저교회파 갱신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시므온 또한 “복음주의”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18세기, 대서양 건너편에서 웨슬리 형제들이 이끈 부흥 운동 역시 “복음주의”라고 불렀다. 1940-50년 어간, 빌리 그래함과 같은 이들은 문화를 적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로부터 떠나려는 주류 개신교도주의들 사이에서 어떤 종교적인 지대를 찾으려했고, 이를 묘사하기 위해 “복음주의”를 사용했다. 각각의 단계들을 지나오며 이 개념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녀왔다. 그리고 오늘날도 역시 기본적인 기독교 신념과 신선한 충격을 의미하기에 사용되고 있다.
나는 1970년대 초에 대학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대한 방어기제로 사용되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고든콘웰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그래함, 해롤드 오켄가 그리고 하워드 퓨 그리고 그들과 같은 다른 신복음주의자들이 설립한 많은 학교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는 복음주의 운동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는 미국 기독교 내에 지배적인 부류였던, 주류 개신교도들에 의해 가리워졌다. 1989년, 내가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맨해튼으로 이동했을때,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세속화된 뉴욕에서의 교회와 그 사역을 위협하진 않았지만, 유별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이 청중들 가운데서 우리가 때때로 사용하던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왔다.
오늘날, 이 도시에 “복음주의”란 이름은 익숙해졌고, 동시에 그 의미 역시도 급격히 변해왔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보수적인 지도자들이 이와같은 재정의를 주도했다. 또한 “복음주의”가 매우 중요한 투표집단이었기에 언론 역시도 이 변화에 한 몫을 거들었다. 언론들이 사람들을 조사할 때, 그들은 어떤 신학적인 신념에 대한 논의나 다른 기준도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당신은 스스로를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을 뿐이고, “예”라고 대답한 사람들을 계수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 가운데 80%를 넘는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마찬가지로 지난 주 앨라배마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복음주의자” 그룹에 속한 80%의 사람들이 로이 무어를 뽑았다. 따라서, 일반적인 개념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은 주로 두가지 양상을 띄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기고백적인 기독교인들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억세게 보수적인 사람들로 여겨졌다. 때문에 "복음주의자"라는 투표세력에 대한 수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불신이 증가했다. "그들,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은 이제 “비도덕적일지라도” 그들의 정치적 진영을 지지하기만한다면 누구든 뽑는다". 이러한 혐오는 복음주의운동 안의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 달 초에, 타임지의 논설가이자 공화당 정부에서 세 번을 일한 피터 웨너는 “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복음주의적 공화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가?”라는 글을 썼다. 이제 복음주의자라고 분류된 유색인 젊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 많은 “복음주의”란 상표를 버리기로 선언했다. 이전에 “복음주의”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곤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단어는 거의 “위선자”와 동의어로 사용되곤 한다. 나는 1970년대에 이 단어를 내 자신이 근본주의자가 아님을 묘사하는데 사용했었지만 오늘날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한다면,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적인 풍경을 바라볼 때(복음주의에 대해서 또 오늘날 기독교에 대해 이해할 때) 두가지 다른 부류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더 적지만 더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을 “대문자 E 복음주의(복음주의의 영어단어가 Evangelicalism인데서 기인)”라고 부르자, 그리고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소문자 e 복음주의라고 부르자. 더 많은 수, 소문자e복음주의는 보수주의, 진보주의 또는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정당에 의해 구분되지 않고 신학적 신념에 의해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근대 영국의 복음주의: 1730년에서 1980년까지”를 쓴 역사가 데이빗 베빙톤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을 설명하면서, 신념의 핵심을 통해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들을 구분한다. 베빙톤에 의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미 한물 갔다고 믿는 주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나 고대 신조들(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경, 그 외의 다른 것들)의 권위와 동등하게 여기는 카톨릭과 달리 성경을 궁극적인 권위로 믿는다. 또한 다른 주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했으며,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음으로부터 육신이 부활했음을 믿는다.
베빙톤의 정리 아래, 또 다른 복음주의의 조건은 회심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깊고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의 만남 말이다. 한편, 이러한 회심은 단순한 교회출석이나 일반적인 도덕성에서 오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희생으로써의 죽음을 믿는데서 온다. 찰스 웨슬리의 유명한 찬양의 가사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주의적인 경험으로써의 회심을 보여준다:
“나의 족쇄는 끊어졌고, 나의 마음은 자유합니다;
나는 다시 일어났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릅니다.”
이제,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말과 섬김의 행동으로 말이죠. 그렇게 그들은 예수께 순종할 뿐 아니라 닮아갑니다.
여론조사의 “대문자E 복음주의자들”도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을까요?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통해 드러난 바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의 복음주의는 나라 곳곳에서, 시민 또는 민속 종교로써 기능하며,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에 있어서 디폴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는 신학적 신념보다는 정치적인 것으로 정의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엄청난 숫자 때문에 언론은 복음주의자들의 투표에 관심을 갖습니다. 자연스럽게, 기존의 복음주의자라는 의미는 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 그리고 세상에 여전히 정치와 결탁하지 않은 더 큰 복음주의가 존재합니다. 미국엔 수백만명의 복음주의자들이 주류 개신교회 회중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성회, 남침례교 그리고 루터교회, 미주리 총회와 같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단들도 있고요. 그러나 두드러지게는 어마어마한 수의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의 장로교교회들은 이러한 동일한 신앙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대문자E 복음주의가 나이를 먹고 있고 감소하고 있지만 소문자e복음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부와 동부 교회들의 엄청난 에너지는 북아메리카의 도시들(새로운 다민족적인 복음주의)로 꾸준히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비서구권 선교사들이 새로운 수천의 지역교회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기 뉴욕, 심지어 맨해튼에도 지난 15년간 우리 기준에 완전히 복음주의적인 수많은 교회들(백인들에게서만 비주류이며, 어떤 정치적 정당에 결탁하지 않은)이 세워졌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이러한 교회들은 인종간 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에 있어 하얀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진보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다문화 교회들은 혼외성교와 같은 이슈에서는 명백히 보수적입니다. 고집스런 일관성을 유지하는 진보나 보수 측의 사람들에게는 복음주의자들이 묘한 혼종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인들은 모든 이슈들에 대해 시키는대로 해야해!라며 오늘날 다양한 중독들을 일으키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문제들에 대항하는 현대의 윤리적인 기준들에 대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젊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낡은 규칙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올 초에 출판된 케네스 스튜어트의 “고대의 뿌리를 찾아: 기독교의 과거와 복음주의 정체성의 위기”는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운동이 다양한 형식들과 다양한 이름들을 갖고 수 세기 동안 있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비슷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반복되며 어떤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몇몇 종교 학자들은 20세기 중반, 복음주의 운동의 리더들은 교단적인 차이를 무시한채 신앙인들을 과거로부터 끊어냈고, 복음주의를 더 넓게 발전시키고 싶어했다는걸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의 기억을 가진 신앙생활보다는 개인 경험이 강조 되었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개인적인 관심을 건드리는 정치적 운동들에 취약해진 이유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성경의 가르침, 이를테면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것, 그리고 가난한자들을 돕는 것에 명백히 반대되는 정치적 관점에도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제 복음주의는 그 어떤 형식 자체보다 더욱 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형식들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뿌리에 더욱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하얀 복음주의보다 더욱 현대의 개인주의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단어, "복음주의"가 여전히 유효합니까? 어쩌면 이제 그 답은 ‘아니오’일 수 있습니다. 속속들이 세워지고 있는 새로운 도시교회들은 당연히 주류 개신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평균적인 사람이 보기에 “복음주의”라고 보이진 않는 것이죠. 이 젊은 교회들이 이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정의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사역자로써, 나는 이 명칭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더라도 그게 중요합니까? 그렇다해도 이게 교회들이 신앙을 잃게 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까지만해도 리버럴이라는 단어는 민주당에서는 외면하던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진보적”이란 말을 좋아했죠. 어떤 점에서 민주당은 이제 더 리버럴합니다. 양상은 그 이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본질의 왜곡을 의미하는건 아닙니다.
동일한 일이 “복음주의”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운동은 아마 그 명칭을 외면할 수도 혹은 그 이름의 중요성을 격하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과 역사적 쇄신은 존재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그 이름만을 거절하는 것 뿐 아니라 더욱 세속적이 될 것이라는 예측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곳 뉴욕에서 보아온 바에 의하면 그럴가능성은 적습니다. 또, ‘퓨 연구소’와 다른 여러 곳에서 연구된 것들에 의하면 세속에 물든 종교 교단들은 가파르게 무너집니다,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자신의 신학적 신념들을 붙들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세상과 혼합되는 것에 저항할 때.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의 리더십이 다양해질 때, 복음주의자들(또는 앞으로 그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게 되든)은 좌-우의 정치적 카테고리들이 틀렸음을 증명할 것이고, 그들은 이를 위해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티모시 켈러
*Newyorker에 기고된 17년 12월 19일 기사 "Can Evangelicalism Survive Donald Trump and Roy Moore?"의 번역입니다.
원문
https://www.newyorker.com/news/news-desk/can-evangelicalism-survive-donald-trump-and-roy-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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