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주일 저녁은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경건한 시간을 갖습니다. 최근에는 ‘그 해 우리는’을 한창 즐겨보았습니다. 최웅, 국연수가 빚어내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에 서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설렘을 잘 전해주더라구요. 연애의 높낮이가 주는 달콤함과 가슴아픔을 따라가며 작품을 즐기기를 몇 달여, 지난주에 드디어 ‘그 해 우리는’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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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최웅(최우식 분), 국연수(김다미 분) 커플의 단짠 로맨스를 큰 줄기로 진행됩니다. 덕분에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지나버린 연애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함께 보던 아내가 “오빠도 그 언니랑 저랬어?”라며 강제로 상기시켜주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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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커플의 연기나 이야기의 전개가 훌륭했으며, 이야기 또한 뻔한 듯 뻔하지 않았기에 드라마는 러브스토리라는 장르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생각합니다.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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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가 본 드라마의 빛나는 지점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주연 커플의 연애사, 조연들의 짝사랑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이 드라마가 단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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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랑”을 다룹니다. C.S 루이스의 사랑 구분법을 빌리지만, 최웅과 국연수 간의 사랑은 에로스적일 뿐만 아니라 필로스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친밀한 친구 관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들, 또 아예 대놓고 “친구하자”라는 파트를 통해 친구와 연인의 유사점을 말합니다. 나아가 에로스에 실패한 엔제이와 김지웅은 그럼에도 여전히 필로스적 사랑(우정)으로 남으면서 사랑에 실패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로스만이 ‘사랑’이고 “사랑이야? 우정이야?”를 묻는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그게 아니라 둘 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또, 할머니와 국연수의 관계 또한 사랑입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스토르게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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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드라마는 사랑의 거의 모든 종류들과 모든 상황들을 잘 다루어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최웅의 부모님을 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숨어있지만, 사실 최웅의 부모님이 아니라면 ‘그 해 우리는’의 모든 인간관계는 성립하기 어려워집니다. 모든 인물들이 최웅의 부모님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 인물들 뿐만 아니라 엔제이와 최웅까지도 최웅의 부모님을 매개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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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 부모님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은 아닙니다. 극이 진행되며 시청자들이 알게 되지만, 최웅은 입양된 아이였습니다. 부부가 아이를 잃게 되며 입양한게 바로 최웅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점으로 최웅 부모님의 사랑은 전혀 다르게 비춰집니다. 이야기 전에는 최웅 부모님이 최웅의 친구들을 잘 대해주는게 최웅의 부모이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김지웅과 국연수를 진심으로 자녀처럼 대하고 있다는(혹은 최웅보다 더 자녀처럼 대하기도)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최웅 부모님의 사랑은 스토르게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더불어 최웅의 부모님이 보여주는 아가페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환대’입니다. 최웅의 부모님은 모든 사람들을 환대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웅이네’에서 연결됩니다.
만약 최웅의 부모님의 아가페 사랑이 없다면, 그래서 최웅이 입양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인물들 간의 사랑의 관계들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드라마는 우리가 본 것처럼 아름다웠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다미는 할머니와 아둥바둥 살면서 본인의 커리어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흔한 우리네 모습이었을테고, 김지웅은 부모에게 버림 받아 매일을 우울함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모습이었을겁니다. 최웅 역시도 다르지 않았겠죠. 작가는 사랑이 빠져버렸을 때의 이들의 현실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일종의 결핍이 있다는 것은 주의깊게 봐야할 사실입니다. 최웅 부모님의 아가페 사랑이 없다면 어쩌면 이들의 세계는 우울함 그 자체이거나 혹은 분노와 상처로 점철된 삶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웅의 부모님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호고 돈도 충분히 벌만큼 벌었을텐데,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밝고 반기는 자세와 태도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사는 일, 인간적으로 성공하는 일이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남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일, 관계 맺고 연결되어가며 살아가는 일이야 말로 삶의 본질임을 그야말로 몸으로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드라마의 주제는 마지막 국연수의 결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더 크고,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날 수 있었던 국연수는 파리로 향하는 스텝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남기로, 자신을 알아줬던 선배의 회사에 남기로 결정하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은 듯한 모습입니다.
막연히 생각해봤을 때, 파리의 화려한 사무실과 보장된 미래, 그리고 서울 어딘가 평범한 빌라 한귀퉁이에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일, 둘 중에 무엇이 더 빛나는 일인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오래된 빌라 골목에서 더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걸 보게 됩니다. 드라마는, 무의미, 흐린, 무채색의 삶을 채색하는건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라는걸 그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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