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모든 사람들은 루스로 갔습니다. 루스는 벧엘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나안 땅에 있습니다. 그 곳에서 야곱은 제단을 쌓고 그 곳의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6-7절, 쉬운성경
누구든 불확실성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계획하고 태어나거나 어떤 의지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라 하더라.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며 인생을 지난다.
인생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갖게되는 존재자의 불안이란게 있다. 존재는 비존재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 계속해서 살아 있기 위한 노력은 경제적인 발버둥,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 나아가 대를 잇기 위한 발버둥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호수와 같아서 이 호수 위에 떠 있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발버둥을 쳐야한다고 믿는다.
야곱도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결핍된 존재. 형의 덤이 되지 않으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발목을 잡고 따라나왔다. 이후로는 존재를 향한 끊임없는 발버둥.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살아남는데는 어떤 것도 허용된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자라고 하듯이 야곱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협잡질과 비도덕한 일들을 일삼는다. 형을 속이고, 아빠를 속이고, 외삼촌을 속인다. 그러다 걸리면 야반도주하기를 반복. 아들들은 어떤가?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야곱의 아들들도 아버지 판박이다. 덕분에 이 가족, 평안할 날 없이 매 순간이 줄타기이고 작전의 연속이다.
산다는건 그런거다. 치사맞아도 어쨌든 먹고 살아야하고, 선과 악의 기준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악이다. 줄곧 그렇게 살았다. 신적인 어떤 계시도, 경이로운 무언가도 죄다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기준을 나누어 사용한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가출했을 때, 하룻밤 잠을 청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동일하게 하신다. 도망하는 중에 환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삶이 고단할 때,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앞길이 깜깜할 때 우리는 어떤 미신적인 것, 바꿔말해 내가할 수 없는 것을 이뤄줄 존재를 찾는다. 잘나갈 때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세상이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모든 것이 망가지고 내가 손 쓸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세상을 뒤집어 엎어주길 기대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캄캄할 때에야, 인생을 사는 일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걸 깨달을 때에야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의지한다. 어려운 시기에 거장들의 명언들에 마음이 끌리고 특별한 꿈이나 징조들이 마음 깊은 곳에 남는 것이 그렇다. 야곱이 잠들었을 때 사닥다리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야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꿈을 붙들었다. 이런 환상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내가 특별한 영화 속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런 시련을 겪는거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고 밑바닥을 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달아난 나에게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야곱이 잘나갔다면 그저그런 꿈이었겠지만, 도망자 야곱에게는 달디단 오아시스 같은 꿈이었다. 깨어난 주술을 부리듯이 누웠던 돌베게를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만일 안전하게 이리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면, 약속을 이뤄주신다면 당신은 제 하나님이 되실 겁니다"
야곱에게 제대로된 신앙이 있던게 아니었다. 그저 뭐라도 잡고 싶었던거다. 선조에게도 나타났다는 그 절대자, 그 신이 꿈을 찾아 왔고 똑같은 약속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겠지만, 그래도 아빠 이삭 옆에서 배운대로 의식을 거행했고 야곱은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정말로 야곱은 거부가 되고, 아내와 자녀까지 갖게 되었다. 어엿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야곱의 집"이 생겨난거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듯 보였던 야곱, 다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에서가 그랬듯이 라반과 그 아들들의 미움을 받았고, 에서에게 그랬듯이 야곱은 다시 도망한다. 도망하는 야곱은 어디로 가야할까? 야곱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보기로한다. 있을 곳이 그 곳 밖에는 없기에. 형의 화가 누그러뜨려졌기를 기대하며 어려운 발걸음을 옮긴다.
형에게 혹시나 공격을 받을까 걱정한 야곱은 또 다시 잔머리를 짜낸다. 떼를 둘로 나누어 가는 것이다. 첫번째 무리가 형을 만나 선물을 전달하고, 낌새를 살핀다. 만약 이 때 형이 여전히 화가 나 첫번째 무리를 공격한다면 자신과 두번째 무리는 그대로 도망하는 것이다. 야곱은 이렇게 두 무리로 나누고도 스스로는 두번째 무리를 보내고 가기로 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천사와 씨름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걱정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나 "내가 싸우겠다"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하나님과도 싸운다. 그리고 엉덩이를 위골당한다. 다리를 끌며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는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야곱을 대한다. 야곱의 모든 계획과 계략이 의미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신다는 메시지가 이 장면을 통해 전해진다.
그렇게 야곱은 벧엘을 떠올린다. 빈털털이 도망자로 뛰쳐나올 때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그 때를.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이 그 일들을 모두 이루셨음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건 그저 환상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정말로 하나님이 다스리셨다는 걸. 그 길로 야곱은 벧엘로 향한다. 자신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경건하게 세상의 창조주 앞에 선다. 가족들을 목욕재계시키고 그 앞에 서서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지킨다. 야곱은 자신의 삶의 첫장부터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그제야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한다.
그렇게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집"이 된다.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을 읽어볼 때, 야곱이 보게 된 미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계획을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삶을 살던 그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을 살기로 한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배운다고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설득 속에서 익히게 된다. 불안감과 두려움 가운데 삶을 걸어가고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은 너는 나의 집을 세울 것이라고, 나의 집의 주인은 바로 나니 너는 안연히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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