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43절
Luke 6:43 Οὐ γάρ ἐστιν δένδρον καλὸν ποιοῦν καρπὸν σαπρόν, οὐδὲ πάλιν δένδρον σαπρὸν ποιοῦν καρπὸν καλόν. 44 ἕκαστον γὰρ δένδρον ἐκ τοῦ ἰδίου καρποῦ γινώσκεται· οὐ γὰρ ἐξ ἀκανθῶν συλλέγουσιν σῦκα οὐδὲ ἐκ βάτου σταφυλὴν τρυγῶσιν. 45 ὁ ἀγαθὸς ἄνθρωπος ἐκ τοῦ ἀγαθοῦ θησαυροῦ τῆς καρδίας προφέρει τὸ ἀγαθόν, καὶ ὁ πονηρὸς ἐκ τοῦ πονηροῦ προφέρει τὸ πονηρόν· ἐκ γὰρ περισσεύματος καρδίας λαλεῖ τὸ στόμα αὐτοῦ.
- 평지에서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신다. 주로 지금 어려운 사람들은 장래에 위로를 받을 것을, 지금 부요한 사람들은 장래에 어려워질 것을 이야기하신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요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말씀에 따라 똑바로 살면 가난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의 시대였기 때문에. 로마의 지배를 받는, 노예와 같은 시대였기 때문에. 따라서 위와 같은 가르침은 부자와 빈자에 대한 가치 평가라기 보다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부유해졌나” “어떻게 가난해졌나”를 묻는 질문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자신을 수탈해가는 사람들마저도 사랑해야한다는 이야기이다.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에서도 나오듯, 당시 로마의 앞잡이로 불릴 수 있던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로마의 압제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은 실제적이지만 따르기 쉽지 않은 말씀이었을 것이다. - 두 가지 비유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맹인을 이끌지 못하고, 제자가 선생보다 낫지 못하다고 이야기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언제나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마치 3살 짜리 아이가 2살 짜리 아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아서 이 가르침은 곧장 스스로를 옭아 멘다. 인간들은 늘 자신이 선과 악의 분별자가 되기를 원한다. 명제를 세우기를 좋아하고,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기를 원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꽤 오래전 싸이월드의 글귀를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소름처럼 오랜 후에 자신이 했던 말, 자신의 분노를 돌아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일인지 돌아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런 분노들, 자신이 내린 정의가 꽤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을 쫓아다닌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스스로의 자유와 발전을 묶어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스승이 되려하면 안된다. 우리는 그들의 스승이 될 수 없다. 다만 참 스승에게 이끄는 몽학선생 정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두번째 이야기인 들보와 티끌의 비유도 위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우리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은, 헬라어로 δοκὸν, 통나무를 의미하는데 그냥 나무가 아닌 두꺼워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한 나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나무를 눈에 둔채로, 상대방의 티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비이성적이다. 상대의 티끌의 위치조차 아니 정말 그것이 티끌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내 눈의 들보를 치워야 상대의 티끌을 치워줄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치우기를 힘써야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들보를 치우지 않고 타인의 티끌을 치우기를 바라는 사람을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정말로 내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눈에 티끌이 있는 것을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나무 이야기
좋은 나무는 악한 열매를 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악한 열매의 악한은 “썩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무는 나무의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나무의 상태를 이야기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이 나무에 대한 비유가 말 그대로 좋은 종류의 나무인지 나쁜 종류의 나무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시기 때문.
이어서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이 생산된다고 말씀하신다. 나무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열매는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헬라어로보면 조금 더 확실한데, ὁ ἀγαθὸς ἄνθρωπος, 먼저 선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선한 사람이 어떻게 선한사람일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ἐκ τοῦ ἀγαθοῦ θησαυροῦ τῆς καρδίας 마음의 선한 보물로 부터 비롯된 사람을 말한다. 다시말해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곧 선한 사람인데, 이 선한 마음을 표현한게 재미있다. ἀγαθοῦ θησαυροῦ τῆς καρδίας. 마음의 선한 보물이라고 표현한다. θησαυροῦ는 쌓인 것, 모아진 것을 뜻하는데, 마음에 모아진 것이 선할 때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이는 선한 나무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모아진 악한 것으로 인해 악한 사람인 것이고, 그 사람은 악한 것을 낸다고 이야기한다.
나타나는 행동, 말, 표정을 봤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주로 아주 어렸을 때의 성장 배경을 조사한다. 또한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조사를 한다. 그래야 이 사람의 현재 행동을 올바르게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은 지금 당장 선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동안 쌓아 온 부단한 선한 행동들 때문에 그 마음 안에 쌓인 선한 영향력들, 이를테면 그가 본 것, 들은 것,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는 그가 행동한 것들이 쌓여 선한 사람이 되고 자연스럽게 선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반복된 행동과 훈련, 흔들리지 않는 반석
곧바로 예수님은 행동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선한 마음을 형성하는 그 보물들은 바로 행동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여주여, 말로만하지말고 진짜 예수님께서 주인이시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돌려대고 옷을 갖다주는 그런 행동들 말이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깊이 파고 주춧돌을 단단한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놓은 사람. 사람의 연속되고 반복된 선한 행동은 그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한다. 운동을 할 때 매일 하는 운동, 힘들고 어려운 동작들과 무게를 들어올리는 행위는 이후 탁류와 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이를 견뎌내게 한다. 그러나, 반석위에 있지 않은 사람, 그간의 훈련들이나 선한 마음들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사람은 탁류를 이겨내기 어렵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마지막날 공적을 태워보신다고 하신다. 강력한 시험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때 이 탁류를 이겨내어 남은 사람은 상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큰 화를 보게 된다. 구원을 받는 것은 같지만 불 가운데서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훈련해야한다. 남을 판단하기보다 내가 선해지기 위해 살아내야한다. 오늘의 선택, 행동들이 어렵지만 훈련해내면 나무와 같이 성장하여 더 크고 많은 선한 열매들을 내놓을 것이다. 이 열매들은 어떻겠는가? 또 나무를 내고 나무를 내면 더 많은 과실들을 내게 되는 아름다운, 시편저자가 노래한 그 숲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직 채워진 것만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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