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A Little Exercise for Young Theologians, IVP
내면으로부터의 결핍, 그러니까 내면의 "모름"을 채우기 위한 공부가 있다. 공허한 내면을 지적인 에너지로 채우는 이 행동은 허기진 배에 음식을 우겨 넣는 것처럼 포만감을 주고 오늘 하루도 생존했다는 안도감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 사회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공부가 있다.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어그러짐을 발견하고 어떻게 고쳐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때 필요한게 공부다. 사실 세상의 문제들은 대부분 일전에도 있어왔던 일이며 생각보다 새로운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수 많은 경험으로부터 유추된 이론들을 익히고 일어난 문제로 가져와 이를 적용해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꽤 많은 학문적인 것들이 전자의 것을 취하고 있고 후자의 예로는 보다 실용적인 학문들(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이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디쯤에 위치할까? 언뜻 신학을 처음 접하는 신학생들은 신학을 사변이나 논리적인 정합성을 위함이라 여긴다. 그들은 이 예리한 칼을 다듬기 위해 어려운 훈련들, 이를테면 원어에 대한 문법적인 교육이나 다양한 교리적인 의견들을 접한다. 그들에게 신학은 싸워 이기기 위한 것이며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깨닫기 위한 작업이 된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어느정도의 세상의 이치들을 깨달았다 생각하는 학생들은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조금 나은 존재라 여기기도 한다. 마치 자신은 세상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인양 행동하기도 한다. 단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며 모든 신학생들이 거쳐가는 단계이기도하다.
틸리케는 이와 같은 신학적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춘기, 유년기에 비해 신체는 커졌지만 그 내면이 아직은 작아 어른과 아이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시기이다. 그들은 줄곧 자신들은 어른이라 믿지만 미성숙한 이들의 사고체계는 엉뚱한, 또 다소 어리숙한 행동들을 빚어낸다. "철이 없다"라는 문장은 이 사춘기를 정의할 수 있는 정의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지며 그 이유들을 찾아나선다. 이 과정을 무난히 넘기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큰 사고, 혹은 씻지 못할 상처를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남기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어려서 그렇다"라는 말로 넘길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상처라는게 그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보니 이 경우 꽤 긴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도 있고, 사춘기를 벗어나서도 당분간은 상처에 메여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이 사춘기를 잘 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학적 사춘기도 마찬가지다. 처음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정의하게 되고, 그것의 실체 어느정도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갈고 닦은 이 예리한 칼을 미숙한 신체로 다루기 시작할 때 이는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새싹들을 짓밟아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틸리케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일을 행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유익하겠으나, 많은 이들은 뉘우치기보다는 텅빈 장의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신실함이 증명되었다 여긴다.
문제는 이와같은 사춘기가 일시적이거나 단 한번 지나가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이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언제나 산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을 갖는다. 마치 가인이 선을 행하지 못했을 때 문 앞에 엎드리고 있던 죄처럼, 신학적 사춘기는 언제나 신학자의 또 설교자의 다리 밑에 웅크리고 있다. 그를 삼켜버릴 날을 기다리며.
이처럼 무뎌져 가는 시점에 틸리케의 책을 읽은 것은 참된 유익이다. 사역을하다보면 변하지 않는 공동체에 쉬이 실망하게 되고 끝내는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많아지는데, 이때마다 고개를 드는게 이 신학적 사춘기가 아닐까싶다. 그럴수록 보다 더 신학적 논의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기도에 더 빠져들게 되고 점차로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켜내어 스스로의 의를 추구하는. 나는 저들과 다르고 악한 세상에 먼지를 떨고 다른 곳, 세상에는 없는, 그곳으로 가고 싶게끔 유혹하는 때가 오곤 한다.
그때마다 예수를 기억하자.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사변적인 말만 읊조리는, 명령만 해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 아무런 소망없는 육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스스로 살아냄으로 사람들의 본이 된 그 분을 기억한다면, 나 역시 소망 없는 공동체 가운데에 썩어질 밀알로 있어야하지 않을까? 현실과 하나님 사이를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큰 일을 행하고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있던 엘리야를 다시 불러내어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세상에 발 딛고 사는 그 이유를 존재의 이유를 훑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