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미안해,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정인이를 죽였나
한 인도인이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인도 농가로 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로 한다. 지역의 아이들을 돌보려 밖에 나가 지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중 한 아이에게 형제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아이는 “셋, 또는 넷?”이라고 이야기했다. 무슨 말이냐고, 셋이면 셋, 넷이면 넷 아니냐고 물었고, 아이는 막내가 있긴한데 아파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이가 죽는다니, 위급한 상황 아닌가?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 그녀는 아이의 안내를 받아 막내 아이를 만나러 갔다. 막내 딸은 죽어가고 있었다. 17개월 즈음 밖에 안되 보이는 아이의 몸에는 고름이 찼고, 허벅지는 성인 엄지손가락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러나 아이 부모에게는 아이를 고칠 의지가 없어보였다. 왜 이렇게 되었냐는 질문에 “글쎄요, 곧 죽을건가봐요”라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도통 먹을걸 줘도 먹질 않는다며 이미 포기한 말투였다. 병원에라도 데려가봐야하는거 아니냐는 말에는 먹지 않는 아이를 의사가 무슨 수로 고치냐며 핀잔을 주었다. 무료 진료소에라도 갈 돈이 없는거다. 돈을 주겠다고 하며 병원에 가 아이를 치료했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탐탁치 않아했다. 그녀는 아이가 죽었으면 했던 것이다. 이미 아들과 딸이 있었고, 막내 딸은 필요하지 않았다. 일은 둘째 딸이 모두 하면 된다. 막내 딸은 나중에 지참금이나 챙겨줘야하는 애물단지였다. 부모가 아이를 회복시킬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부부는 아이를 고쳐 온 뒤 그 아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웠다. 한 달 동안 기저귀도 갈아주고, 먹을 것도 잘 먹였다.
그러다 아이 부모가 찾아왔다. 딸을 빼앗아 갈거냐고 따져물었다. 그럴 생각은 없다며, 아이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우유 값은 우리가 대겠다면서 잘 키워달라고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우유는 아들에게 모두 먹이고 아인는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 아이 부모는 깨닫는 바가 전혀 없었고, 끝내 아이는 죽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해 문제 삼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으례 그래 왔던 것이고, 이 끔찍한 영아 살해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지속되어왔다.
이야기를 읽으며 정인이 생각이 났다. 문제는 정인이의 양부모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온 사람들이었다는 것. 진리를 이야기하는 약자를 보살펴야한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곳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는 것. 한국 기독교의 상태가 여실히 드러난 것 아닐까?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마치 내가 하나님과 친하니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토록 가벼운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 생각해봐야한다. 정말로 이것을 진리로 믿고 있는지, 아니면 이것을 진리로 가장하여 세상의 다른 것들을 통제하고 싶은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