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시사

퍼시픽하이츠에 낙서하는 아시아인을 훈계한 라페이스 CEO(선입견의 위험성과 인종차별에 대한 생각)

에멀전 2020. 6. 18. 16:01

 

이야기

  샌프란시스코 부촌의 퍼시픽 하이츠에서 한 커플이 산책을 하던중 "BLACK LIVES MATTER"이라며 낙서를 하는 아시아인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인데, 이 커플은 멈춰서 낙서를 하는 아시아인을 훈계하며 남의 집에 낙서를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낙서를 하던 아시아인은 왜 안되냐고 물었고, 여자는 이 곳은 남의 집이며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여기가 누구 집인 줄 아느냐고 물었고, 여자는 자신의 집은 아니지만 누구의 집인지는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곧이어 남자는 경찰을 부르던 이 집 주인에게 이야기하던 하라고 말했고 여자는 정말로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아시아인을 보고 내리지도 않고 돌아갔다. 낙서를 하던 아시아인은 그 집에 18년째 살던 필리핀계 미국인 후아닐로씨였기 때문에. 곧이어 영상에 찍힌 여성의 신상은 공개되었고 그녀는 라페이스라는 화장품 회사의 CEO로 밝혀졌다. SNS에서도 난리가 되었고, 그녀는 공식사과문까지 발표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뉘우쳤다. 인종차별적인 선입견이 불러온 끔찍한 사고였다. 

선입견의 이해

여성의 입장으로 돌아가보자. 리사 알렉산더라는 이 여성은 아마도 퍼시픽 하이츠라는 샌프란시스코의 부촌에 이런 아시아인이 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BLACK LIVES MATTER"라는 낙서를 하는 아시아인이 이 동네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것이 되었든 간에, 리사의 생각 깊은 곳에는 "아시아인은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명제나 "건물에 낙서를 하는 사람은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종류의 선입견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선입견은 간편함을 추구하는 인간 특유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범주화 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전화번호로 나눌 때 셋, 넷, 넷으로 나누어 기억을하거나, 무언가를 기억할 때 큰 종류와 범주로 묶어 기억하는 것, 그러니까 카테고리화 하여 기억할 때 훨씬 기억이 빠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모든 정보를 개별적으로 취급할 수 없다. 기억력의 한계요, 지능의 한계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런 편이 훨씬 간편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마트의 물품이 화장품, 과자, 유제품 이런 식으로 나뉘어있지 않고 모든 것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상황을. 생각만해도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사람의 인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곧바로 범주화시켜버린다. 크게는 "괜찮은 사람" "별로인 사람"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고,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또는 흑인, 백인, 황인과 같은 신체적, 표면적 특징으로 범주화시킨다. 또는 사는 지역에 따라 아시아인, 유럽인, 아프리카인으로 나누기도한다. 분명히 이런 지역적인 특징, 또 신체적인 특징으로 묶는데는 유익함이 있다. 이렇게 묶어버리면 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속성을 이해하고 상대하기 간편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문화적 차이로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있을 수 있을 때 이와 같은 선입견은 더 빠르게 서로를 이해시켜주며, 더 빠르게 친밀감을 형성해줄 수 있다. 특정한 운동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류의 운동에 접근할 때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이런 선입견은 잘못되었다라고만 할 수는 없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선입견(특별히 종교적인 선입견)들은 모두 죄악시되었지만, 가다머의 지적 이후에 선입견은 없앨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입견 덕분에 유익한 점이 있다는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러면 이런 선입견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성경은 그 2000년 전에 이와 같은 선입견의 존재를 말하고 있고, 이 선입견에 대해 주의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장 42절

πῶς δύνασαι λέγειν τῷ ἀδελφῷ σου· ἀδελφέ, ἄφες ἐκβάλω τὸ κάρφος τὸ ἐν τῷ ὀφθαλμῷ σου, αὐτὸς τὴν ἐν τῷ ὀφθαλμῷ σου δοκὸν οὐ βλέπων; ὑποκριτά, ἔκβαλε πρῶτον τὴν δοκὸν ἐκ τοῦ ὀφθαλμοῦ σου, καὶ τότε διαβλέψεις τὸ κάρφος τὸ ἐν τῷ ὀφθαλμῷ τοῦ ἀδελφοῦ σου ἐκβαλεῖν.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6장 37절

Καὶ μὴ κρίνετε, καὶ οὐ μὴ κριθῆτε· καὶ μὴ καταδικάζετε, καὶ οὐ μὴ καταδικασθῆτε. ἀπολύετε, καὶ ἀπολυθήσεσθε· 

성경은 남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의 눈에 보이는 선입견만큼이나 자신 역시 선입견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판단은 어떤 전제 위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데, 이 전제가 진리 위에 서 있는게 아닌, 자신을 근거로한다면 그 역시도 그릇된 전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떻게 아시아인은 이 곳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거지?"라는 명제만으로는 "아시안인은 이곳에 살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는 리사의 선입견을 비판할 수 없다. 둘 다 의견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위의 사례에서는 후아닐로씨의 거주사실에 대한 여러 증거들과 사회적 합의에 의한 문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리사의 선입견이 깨졌지만, 만약 그런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위의 아시아인이 정말로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누가 리사의 의견을 반박할 수 있을까? 아마 리사는 "거봐 내 생각이 맞았잖아?"라는 자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경험적인 사건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허점이 있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때 리사의 선입견은 "진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와 같은 공동의 진리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서는 만물의 합의점인 하나님의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입각한 판단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할만하다. 

선입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과연 나는 "진리"에서 벗어난 선입견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한다.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과연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며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지 돌아봐야한다. 그저 다수의 생각이라고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의 생각, 이건 이들의 생각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수에 의한 다수의 폭력과 같은 방법 뿐, 어떤 평화로운 방법도 이를 해결해 줄 수 없다.